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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16
<잔칫날>: 불효자는 웁니다
박인호(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독립영화에서 김록경이 연기한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많은 영화에서 막다른 곳에 도달하거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인물을 연기했다. 고되고 끔찍한 상황일수록, 빠져나갈 틈이 없는 사건일수록 그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거나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정으로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냈고, 묵묵히 움직이는 몸짓만으로 고달픔과 악다구니 사이를 오가는 불운한 남성을 표현했다. 배우 김록경은 표정을 드러내는 데 인색하며 미세한 경련과 흘깃 쳐다보는 눈길로 영화의 분위기를 바꾸곤 했다. 지극히 사실적인 인물이 살아가는 일상을 꾸밈없이 연기한 그의 모습과 그가 연출한 영화는 닮은 것 같다. 과묵하고 선량하며 채근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태도와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 활발하게 연기를 하던 그가 한동안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싶더니 단편영화를 연달아 연출하고, 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첫 장편영화를 만났다.
<잔칫날>은 아버지의 병실에서 시작해 아버지와 낚시 여행을 떠났던 바다에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이 영화의 무의식처럼 자리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경만(하준)과 경미(소주연) 남매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을 여러 층으로 차곡차곡 포개놓을 수 있고,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단계마다 조금씩 변화하고 변주되는 감정의 폭을 느낄 수 있다. 경만의 고단함은 나아지지 않는 직업 환경, 오랜 병원생활로 쌓여만 가는 고지서, 병실에서 분장을 미처 다 지우지 못하고 새우잠을 자는 모습에서 감지된다. 특히 아버지가 손을 뻗어 잠든 아들의 머리카락에 묻은 분장용 안료의 자국을 지우는 제스처는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환한 얼굴과 그 얼굴로 만든 영정 사진과 연결되면서 특별한 감흥을 자아낸다. 아버지는 아들 곁에 있었고, 지금은 떠나있음을 그 손짓 하나로 보여준다.

<잔칫날>을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속단하긴 이르다. 이 영화는 아버지의 장례비를 벌기 위해 빈소를 벗어나 팔순 잔치 사회를 봐야 하는 상주 경만의 울지도 웃지도 못할 고난기이자 하필 팔순 생일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마을의 소동극이기도 하다. 소동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역할뿐 아니라 경만이 사흘간 맞닥뜨린 생전 처음 겪는 복잡한 장례절차와 행정적 처리와 돈 계산과 마을을 벗어나 빈소를 지켜야 하는 경만의 의무와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서사적 장치로만 기능하지 않고, 경만이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고 장례식장에 들어가 또 다른 상주와 마주하게 만듦으로써 부모를 잃은 슬픔과 황망함과 탄식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한다. 경만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환대를 받다가 급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원인제공자로 지목되고, 이 동네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면서 빈소에 혼자 남아 문상객을 맞이하고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며, 불이 꺼지지 않게 주의해야 하는 향을 지켜봐야 하는 경미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 근처에 머무르게 된다. 아버지의 빈소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이라는 사실에서 경만이 처한 여러 겹의 결핍(가난과 돈, 입관비를 벌기 위해 빈소를 벗어난 처지, 우연으로 얽힌 막막함과 소동이 만들어낸 억울함과 울분)과 아이러니가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아버지의 장레식과 할머니의 팔순잔치, 조문객도 거의 없이 텅 빈 장례식장과 동네 사람들이 총출동한 떠들썩한 잔치, 경미가 듣고 있는 친척의 잔소리와 핀잔과 욕설과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는 경만의 참담한 침묵과 항변, 사례비와 보너스 앞에서 수시로 입장과 말을 바꾸는 동네 사람들의 낯간지러운 변명과 사과를 통해 <잔칫날>이 포착한 사람들의 진면목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둘째로 꼼꼼하게 묘사한 장례절차는 김록경의 죽음과 애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알려줄 어른이 없는” 경만과 경미는 처음 겪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른다. 영정 사진만 덩그러니 있던 빈소에 소박한 꽃장식이 들어오고, 제사상이 차려지며, 문상객이 찾아온다. 입관식을 진행해야 하고 화장이냐 매장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손님들이 먹을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지, 돈은 넉넉한지 챙겨야 하고, 불현 듯 솟아나는 상실과 슬픔과 애통함 앞에서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경미는 빈소에서, 경만은 다른 마을에서 겪을 뿐, 남매의 사흘은 고되고 힘겹다. 특히 입관식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경만의 일그러진 얼굴과 경미의 오열이 장례지도사의 조용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와 숙련된 손길과 만날 때는 <잔칫날>에서 잊기 힘든 순간을 만들어낸다.
셋째로 장례식장의 적막함과 팔순 잔치의 떠들썩함, 장례비 걱정으로 필사적인 경만과 “어머니의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은” 일식(정인기)의 소박한 소망 등 대비되는 요소들이 촬영과 로케이션 장소, 편집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대비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병실, 장례식장, 마을, 경찰서에 갇혀 있던 남매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탁 트인 바다와 마주한다. 교차편집을 통해 두 장소, 두 남매, 두 가족의 대비되는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장례식장의 어둠에 스며든 듯 먹먹한 조명,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숏 분할과 자연광을 사용한 마을의 환하고 밝은 햇살과 평화로운 마을 전경이 대비된다. 경만과 경미는 서로의 장소에서 아버지를 애도하고, 때론 애도할 수 없어 괴로워했으며 이제 아버지와 낚시를 했던 장소로 돌아간다. 첫 장면에서 “다시 바다에 낚시하러” 가자던 아버지의 소망이 남매의 마음과 합해진다. 그리고 <잔칫날>에서 처음 보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 속 모습만큼이나 밝고 환한 경만과 경미의 꾸밈없는 표정을 보게 된다. 김록경은 남매가 처한 힘겨운 나날과 아직 끝맺지 못한 애도를 완수할 여지를 주기 위해 남매의 모습을 정지화면으로 고정시킨 것 같다.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하거나 고통과 고난을 통해 성장할 것이라는 결론에 섣불리 안착하기보다 이들의 현재에 멈추는 것이 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남매의 삶에 이제 큰 변화가 도래할 사흘이 지나갈 무렵, 그 순간이 이들에게 온전히 속할 수 있도록 감독 김록경은 뒤로 슬쩍 물러난 느낌이다. 자신의 인물을 믿는 마음과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도 배우들이 오롯이 인물의 감정과 마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격려하고 기다리는 모습이 <잔칫날>의 미덕이다.